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diary

일어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가는 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. 냉동칸에서 얼려둔 얼음을 다섯 알쯤 꺼내 크린랩 봉지에 넣고 문지르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. 나 그때 열두 살. 아직은 푸른끼 남아있는 밖을 보면서 오늘은 또 어떤 핑계로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을 했지.

 

 

그 당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해 조각난 파편을 주워보자면, 학교 끝나고 천이백원짜리 닭꼬치를 사먹으려 건너던 그 육교 위에서, 그러고 보니 오늘 너 눈이 왜 이렇게 부었냐는 말. 그땐 울었다는 말을 죽기보다 하기 싫어서 라면을 먹고 잤네 어쨌네 하는 말로 둘러대곤 했었다. 울었다고 말을 해도 어제 본 영화나 드라마가 슬퍼서였다는 이유였지 지금까지 이런 일 때문에 그랬다는 말을 하지 못했고. 할 수 없었어. 언제나 들어올까. 언제나 평온해질까. 저 분노가 언제쯤 가시게 될까. 언제쯤 드르렁 거리며 잠에 빠질까 하는 생각들로 바들바들 떨며 보낸 새벽,

 

 

내 불행을 숨기며 등교를 준비하는 아침.이 제일로 비참하지 않았나싶다.

 

 

너무 힘들고, 몸이 너무 지치고 개시팔짜증나 죽겠는데, 일하고 늘어져 들어오니 오후 열한시 반. 드럼이니 스피커니 집이 떠나가라 휘갈겨대고 있길래 내 안에 모든 게 폭발하지 않았나 싶다. 소리 줄이고 지금 몇 시냐고 으르렁대곤 곧장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는데, 딱 그랬다. 홧병으로 죽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면서 머리를 잡아 뜯으며 울었다. 내가 아무리 엉엉대고 울어봤자 문 너머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다 뭉개져 버리고 말아서 더 울었어.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세수를 하는 와중에 얼굴이 짓이겨져. 이 표현이 정확할거야. 오만상을 찌푸리게 되는 거야. 세수하다 울다를 반복하고 조금 추스리고 나왔는데, 스킨을 바르는 중에 터져버렸네. 나는 꼬맹이가 울어대듯 엉엉 울었고, 아빠는 놀라서 야 껐다 하면서 곧장 자버렸고, 자는 줄 알았던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어깨를 쓸어줬어. 그래서 나는 또 울었지. 이런 개같은. 엄마가 같이 우니까 그냥 나 같은 건 왜 때문에 사나 이런 생각이 또 들고. 그냥 반복이야 계속해서.

 

 

지금 내가 제일로 비참한 이유는, 내가 보내버린 시간이 너무. 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내 그 시간들이. 이건 뭐 어떻다는 말도 못하겠고 그냥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. 이번에는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안 되면 어쩔껀데 라는 가시로 튀어나와 맘을 갈겨대고 안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사람 잠도 못 자게 쿵쾅궁쾅코앙아앙하며. 난 분명히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만 했는데 새가 울고 날이 밝았어.

 

 

그래서 지금 난, 내 불행을 숨기며 저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너무 비참해.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자고 일어나 부어있을 눈이 너무 걱정돼서 잠도 오지 않아. 이제는 아침부터 마주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, 부대끼며 지내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너 눈이 왜 그래?‘ 라는 질문을 받을 순 없겠지만, 이 비참한 감정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.

 


그리고 나는 이렇게 또 이곳으로 도망쳐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 말하고 있지. 내 우울함과 불행함을 숨기고 싶어서 여기 이곳으로 도망쳤어. 열둘의 나와 스물여섯의 나. 나는 전혀 성장하지 못했어.



참을 수 없어져서 나, 일어선다

봐라, 나는 도망친다.

도망치는 나를 내가 붙잡는다.

앉아봐.

더는 도망을 못 가.

그때나 지금이나. 그리고 언제까지나.

앉으라구.   <외딴방_신경숙>




좋아하는 구절이 이렇게나 내 이야기일 수 있을까.